시조 고려 좌복야공 양식의 13대손이며 보문각 대제학 금성군(錦城君) 순우의 12대손이고 이조초 도평의사사사 억(薿)의 차자인 직장공 원길의 현손이다.
고조(高祖)는 만호(萬戶) 효강이시고 증조는 생원 장(萇)이시며 조(祖)는 통정대부 병조참의 삼준(三俊)이시고 부는 생원 심(諶)의 2자중 장남으로 명종 갑인(1554)년에 출생하셨고 일찍이 1588년 문과에 급제한 사실이 국조방명에 등제되어 있으며 벼슬이 예조좌랑 겸 춘추관 기주관 및 태안군수를 지내셨고 임란(임진왜란)때는 파천 호종공신이며 증 통정대부 승정원 죄승지에 제수되셨다. 졸년은 미상이고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후평 오좌이다.
배위는 숙부인 파쳥윤씨이며 생졸년은 모두 실전이고 묘는 여공 합봉이다. 슬하에 두 아들을 두셨으니 장(長)은 숭이랑 구(矩+木)요 차(次)는 같은 숭이랑 작(綽)이며 장계(長系) 손 정영(鼎榮)은 금천파 파조이시다.
방계로 공의 아우 여즙(汝楫)은 벼슬이 군기부정이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전몰하셨고 그의 아들 응순(應順)은 선조왕이 란을 피하여 의주로 몽진할 때 어가를 충성껏 모신공으로 호성공신의 훈호를 받았으며 벼슬이 자헌대부이고 충근정양으로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익흥군(益興君)에 봉사되었으며
손 사과공 의건(義健)은 연백파 파조이고 증손에 제용감봉사 종영등 제위가 있으며 이하 직방계를 막론하고 조상의 빛나는 후광과 음덕으로 문호가 창대하고 수많은 후손이 있으나 한정된 비면관계로 불가 진록함은 유감이며 위대하신 공의 관리지장(冠履之藏)이 이곳에 정해진지 이미 300 수십여년이 지나도록 석물이점 구비치못하여 항상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던 중 금차 중앙화수회에서 경모사업의 일환으로 직파 현조의 묘역치산비에 보고에 힘입어 경향근족출연으로 입석하게 됨은 다행한 일이며
이에 후손들은 하나같이 뜻을모아 정성껏 영역을 가꾸는 한편 아울러 길이 선영의 명복을 빌것이며 끝으로 황해도 금천과 평산 및 연백지구에 수많은 후손이 살고 있으나
불행하게도 국토의 분단으로 일근지손으로 혈족의 정을 나누지 못함은 통탄해 마지 않으며 더욱 수년전에 간행한 갑자대동보에도 극소수의 월남 종친을 제외하고는 함께 합보치 못한점 애석하기 그지 없으며 하느님의 가호가잇어 하루빨리 이산 종친이 한자리애 모여 조상을 추모할 날이 오기를 다같이 축원하고 고대할 지어라.
서기 1986년 병인 9월 일
종후손(從後孫) 희서(熙瑞) 근찬(謹撰) 종후손(從後孫) 문희(文熙) 근서(謹書) 우계이씨 중앙 화수회 근수(謹竪)